기독교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할 때 그것을 보는 것은 기쁨을 넘어서 짜릿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은혜를 받고 내 삶을 전적으로 포기한다던지, 또는 내가 살던 삶의 방향을 전적으로 돌이키는 식으로 일어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지요. 대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작은 결단에서 시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어떤 계기로 수요예배를 나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수요일 저녁은 내가 평소에 즐기던, 다른 날은 안 되고 수요일 저녁에만 가능한 테니스 동우회가 있는 날입니다. 고민을 하다가 테니스 동우회를 내려놓을 때, 그런 작은 결단에서 변화는 시작합니다. 그 작은 결단은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위해서 소중한 작은 것을 포기할 때 오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고, 그 기쁨은 다른 더 큰 포기를 가능하게 해 줍니다. 헌신 뿐 아니라 회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성 어거스틴처럼 획기적인 회개가 일어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우리의 회개도 대부분은 작은 나의 잘못을 돌아보게 하는 성령님의 터치를 무시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면서 일어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성령님은 늘 저의 작은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지적을 무시하지 않고 실천에 옮기면서 믿음은 부쩍부쩍 자랐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CS루이스가 쓴‘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고참 악마인 스크루테이프는 신참 악마인 웜우드에게‘어떤 회개이든지 실천으로만 옮겨지지 않는다면 악마의 입장에서 썩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그러니 신자가 뭔가를 깨닫고 회개하거든 행동에 옮기기 전에 QT를 하고 글로 쓰도록 해서라도 행동을 막으라’고 권합니다. 결국 작은 실천이 큰 깨달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변화는 작은 회개, 작은 포기, 작은 헌신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해 보면 왜 가정교회에서 사람의 변화가 일반 교회에서 보다 더 두드러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목장 모임이 이런 작은 변화를 격려하는 모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눔을 하다보면 마음 속에 있는 작은 고민들을 얘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목장 식구들은 다 함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회개나 포기나 헌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렇게 행동으로 옮길 때 생각보다 큰 기쁨과 성취감을 주고..이렇게 삶은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또 가정교회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가운데서 작은 헌신과 희생과 포기를 요구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모이는 것, 돌아가면서 집을 여는 것, 목장 식구를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 목장 식구가 여의치 않을 때 목자 가정에서 대신 열어 주는 것 등등 절대 못할 큰 희생이 아니고 작은 희생입니다. 이 작은 희생이 쌓일 때 우리의 영적인 근육이 단단해져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교회 목회는 바로 이 작은 헌신, 작은 포기, 작은 회개, 작은 희생이 문화가 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설교에서 적용점을 줄 때도 너무 큰 것을 찾지 말고,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을 만한 작은 것을 권해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역도 성도들에게도 너무 큰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작은 희생을 요구하고 연습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교회에서 문화가 되어 있는 사역박람회도 바로 그런 이유로 하는 것입니다. 1년만 헌신해 보고 더 할지 그만 둘지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가르칠 때에도, 내가 조금 더 손해보고, 내가 조금 더 양보하고 져주고, 눈앞에 작은 이익을 포기할 줄 알도록 권하고 이끌어 줄 때, 통이 큰 사람으로 자라가고 큰 희생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 갈 것입니다. 특별히 목회자는 본을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이므로 우리가 삶 속에서 이런 작은 포기, 작은 손해, 작은 양보, 작은 희생을 생활화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돈에 대해서는 한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고, 눈앞에 있는 이익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고, 어떤 것이 이익이고, 어떤 것이 손해인지 계산에 빠르고, 수지타산을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고 사는 세상에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작은 것에 기꺼이 손해보고, 양보하고, 조금 더 희생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 때 그것은 금방 성도들에게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실천이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배워가는 것 같습니다.